8화. 가슴께
택산함(澤山咸) 구사 → 수산건(水山蹇)
벌써 사십 분째 한 사람 얘기였다.
서른한 살, 자동차 부품 검사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앉으면서 보조배터리부터 꺼내 휴대폰에 꽂았다. 3퍼센트라고 했다. 케이블이 탁자를 비스듬히 가로질러 놓였다.
"제가 말이 좀 많죠. 죄송해요."
"더 하세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건 확실해요."
사귄 지 1년 2개월 됐다고 했다. 회사 사람은 아니고 자전거 동호회에서 만났다.
처음 넉 달은 답장이 십 분 안에 왔다.
"십 분이요. 잰 건 아니고 그냥 그랬어요."
석 달 전부터 느려졌다. 한 시간, 세 시간, 어떤 날은 다음 날 아침.
"바쁜 거 알아요. 이직 준비 중이거든요. 저도 이해하죠. 근데······."
"근데."
"이해하는 거랑 기다리는 거는 다르더라고요."
그때부터 메모를 시작했다고 했다. 휴대폰 메모장에 날짜를 적고, 자기가 보낸 시각과 답이 온 시각을 적는다.
"석 달 치예요. 평균이 네 시간 십일 분. 주중이랑 주말이 다르고요, 금요일이 제일 느려요."
"······."
"먼저 연락하는 건 제가 예순세 번이고 그 사람이 서른일곱 번이에요. 백 번 중에요. 이건 계산한 게 아니라 그냥 세면 나오는 거예요."
"······."
"아 이런 거 이상하죠. 저도 알아요. 근데 제가 원래 세는 게 일이라서요. 불량률 같은 거. 직업병이에요."
그건 짚지 않았다.
"뭘 물으러 오셨어요."
"헤어지자고 해야 되나요, 좀 더 기다려야 되나요."
"둘 중에 하나는 이미 고르셨을 텐데요."
"······네?"
"석 달을 기다리셨잖아요."
그가 웃었다.
"그건 못 정해서 기다린 거예요."
"뭘 못 정하셨는데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저를······."
거기서 말이 끊겼다. 화면을 켰다가 껐다. 4퍼센트로 올라 있었다.
"이게 좀 웃긴데요."
"네."
"답장이 빨리 오는 날 있잖아요. 그런 날은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해요."
"······."
"느린 날은 별로 안 좋아해요. 밉다는 게 아니라 그냥, 아무 느낌이 없어요."
노트를 펴서 그 말을 적었다.
"그거 적으시는 거예요?"
"네."
"뭐라고 적으셨어요."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물어보실 게 그 사람 마음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그럼요."
한참 있다가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게 그 사람인지 답장인지요."
통을 꺼냈더니 그가 손목을 들여다봤다.
"저 두 시 반에 나가야 되는데 괜찮아요?"
"그 전에 끝납니다."
산가지를 나누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 말했다. 동호회 사람들 얘기, 옮기려는 회사 얘기, 자전거 체인 갈아야 된다는 얘기. 네 번째쯤 나눌 때 조용해졌다.
택산함(澤山咸)이 나왔다. 네 번째 자리가 움직였다.
"함괘예요. 다 함 자를 씁니다."
"다요? 전부라는 그 다요?"
"글자는 그건데 여기선 느낀다는 뜻으로 읽어요. 느낄 감(感)에서 마음 심(心)을 뺀 글자거든요."
"마음을 왜 빼요."
"생각하기 전에 오는 거라서요."
"생각 안 하고 어떻게 사람을 만나요."
"그건 저도 모르겠는데요."
"······."
"위가 연못이고 아래가 산입니다. 산 위에 물이 고여 있는 그림이에요."
"산 위에 물이 왜 있어요."
"움푹 파인 데가 있으면 고입니다. 산이 가만있으니까 고이는 거고요."
괘 맨 앞에는 취녀길(取女吉)이라는 말이 붙어 있다. 혼인 얘기다. 그 얘기를 하려고 꺼낸 건 아니라고 미리 말해 뒀다.
"이 괘가 좀 특이한데요. 아래 칸부터 몸이 올라갑니다. 맨 아래가 엄지발가락, 그 위가 장딴지, 그 위가 넓적다리요."
"무슨 사람 그림 같네요."
"맨 위는 볼하고 혀예요. 함기보협설(咸其輔頰舌). 말로만 느낀다는 자리입니다."
"그럼 네 번째는요."
"안 적혀 있어요."
"네?"
"여섯 칸 중에 그 칸만 몸 이름이 없습니다. 자리로 보면 가슴께인데, 뭐라고 안 적혀 있어요."
그가 자기 가슴을 한 번 짚었다가 손을 내렸다.
"······셀 수 있는 데는 다 적혀 있고, 못 세는 데만 비어 있는 거네요."
"······."
"제가 움직인 게 거기예요?"
"네."
그 자리에 적힌 말은 이렇다. 정길회망(貞吉悔亡), 동동왕래(憧憧往來), 붕종이사(朋從爾思).
"앞쪽은 좋은 말이에요. 곧으면 길하고 뉘우침이 없어진다고요."
"뒤는요."
"동동왕래. 마음이 오락가락하면서 오고 간다는 뜻입니다."
"······그거 저 같은데요."
"그 다음이 붕종이사예요. 벗이 네 생각을 따른다."
"그건 좋은 거 아니에요?"
"좋게 읽으면 마음이 통한다는 거고요. 나쁘게 읽으면 선생님 생각 안에 있는 사람만 온다는 겁니다."
"······."
"석 달 치 메모에 오고 간 게 다 적혀 있잖아요. 그게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간 건지 선생님 머릿속에서 오간 건지는 제가 못 봅니다."
"······그건 좀 심한데요."
"네."
책장에서 책을 한 권 뺐다. 사이에 끼워 두는 종이가 몇 장 있다.
"그거 뒷면에 뭐 적혀 있는데요."
"그쪽은 됐고요."
뒤집어서 네 줄을 적었다. 적으면서 하나씩 읽어 줬다.
하나. 세는 걸 그만둔다. 두 주쯤은 편하다. 그러다 그 사람이 요즘 뭘 하고 지내는지 하나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 물어보면 되는데 물어보는 게 어색해져 있다. — 숫자를 놓으면 그 자리가 빈다.
둘. 계속 센다. 메모가 더 정확해진다. 어느 날 그 사람이 묻는다. 너 그런 걸 왜 다 알고 있어? — 정확해질수록 티가 난다.
셋. 세고 있었다고 먼저 말한다. 그 사람이 웃거나 운다. 어느 쪽이든 그날부터 답장 시간이 달라진다. 이번엔 그 사람이 잰다. — 세는 사람이 바뀐다.
넷. 아무 말도 안 한다. 간격은 지금 그대로다. 만나면 괜찮고 헤어져 돌아오면 또 센다. 내년 이맘때 메모장이 지금이랑 똑같다. —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종이를 오래 봤다. 보면서 케이블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했다.
"둘이요."
"왜요."
"여기만 그 사람이 저한테 뭘 물어봐요."
"······."
"나머지는 제가 말하거나 제가 그만두거나 제가 그냥 있는 거잖아요. 다 저예요."
"······."
"그 사람이 저한테 뭐 물어본 지 오래됐어요. 넉 달쯤 됐나."
세어 봤을 것이다. 묻지 않았다.
"움직인 칸이 있으면 그림이 하나 더 나옵니다. 오늘은 말씀드릴게요."
"두 개예요?"
"네. 건(蹇)이라고 합니다. 절뚝거린다는 글자예요."
"제가요?"
"그림이요."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산을 오르는데 앞에 물이 있는 모양입니다. 못 가는 건 아니고 빨리는 못 가요."
"······."
"이견대인(利見大人)이라고 붙어 있어요. 사람을 보는 게 이롭다고."
"그것도 세라는 거예요?"
"······."
"죄송해요.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종이를 접어서 파우치에 넣었다. 보조배터리랑 같은 칸이었다.
일어선 건 내가 먼저였다. 책을 도로 꽂으려고 일어섰는데, 꽂고 나서도 앉지 않았다.
"가라는 거예요?"
"아뇨."
"······."
앉기는 앉았다. 조금 늦게 앉았다.
두 시 이십오 분에 그가 일어섰다. 배터리는 아직 꽂혀 있었고, 뽑으면서 화면을 봤다. 잠깐 봤다. 아무 말도 안 했다.
오늘 나온 건 함이었다. 칸이 여섯인데 아래 셋이 산이고 위 셋이 연못인 그림이다.
그중에 움직인 건 아래에서 네 번째, 연못 쪽 맨 밑 칸 하나였다.
그 칸이 굵은 데서 가는 데로 바뀌면 위쪽이 연못에서 물로 바뀐다. 아래는 그대로 산이다. 산 위에 물이 얹힌 모양, 그게 건(蹇)이다. 같은 산 위인데 고인 물이 흐르는 물이 된다. 고이면 담기고 흐르면 건너야 한다.
앞이 오늘이고 뒤가 내일이라는 말은 아니다. 한 가지 일을 두 군데서 본 것뿐이다. 함은 느끼는 쪽에서 본 그림이고 건은 걷는 쪽에서 본 그림이다.
가슴께라고 한 건 내가 보탠 말이다. 거기엔 아무것도 안 적혀 있다.
그 말을 하고 나서 조금 후회했는데, 왜 후회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 글은 점술 상담이 아니라, 괘를 렌즈 삼아 상황을 다시 보는 연습입니다. 등장인물과 사연은 모두 가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