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스물두 가지
산풍고(山風蠱) 구이 → 중산간(重山艮)
네 시 십 분에 그가 왔다. 앉기도 전에 다섯 시 반에는 나가야 한다고 했다. 스물일곱, 남자였다. 의자를 당기면서 손목시계를 봤고, 그 뒤로도 몇 번 더 봤다. 손끝에 밴드가 붙어 있었다. 오른손에 둘, 왼손에 하나.
보온병에서 물을 따라 건넸다.
"차는 없어요. 그냥 물입니다."
"네."
"뭐가 궁금해서 오셨어요."
"가게를 접어야 할까요, 계속해야 할까요."
이야기는 흘러나왔다. 어머니가 반찬가게를 스물세 해 했다. 시장 안쪽, 세 평쯤 되는 자리다. 작년 4월에 쓰러졌다. 지금은 재활병원에 있고, 말은 하는데 오른쪽이 아직 불편하다. 그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가게를 맡았다. 1년 5개월째였다.
"엄마가 하던 게 스물두 가지예요. 콩자반, 멸치, 무생채, 그런 거요."
"지금도 스물두 가지예요?"
"네."
"다 하세요?"
"새벽 다섯 시에 나가면 됩니다."
어머니 때는 하루에 사십에서 오십만 원쯤 팔렸다고 했다. 지금은 이십만 원 초반이다. 주말에도 잘 안 넘는다. 단골들이 묻는다고 했다. 사장님은 언제 나오시냐고. "제가 사장인데요." 그러고는 웃었다. 웃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접으면 뭐가 제일 곤란한데요."
"보증금은 나오고요. 저는 다시 취업하면 되니까······."
"그럼 왜 못 접어요."
한참 있었다.
"엄마가 물어볼 거라서요."
"뭘요."
"왜 접었냐고요."
"뭐라고 답하실 건데요."
"장사가 안 돼서요."
"그럼 됐네요."
그가 물잔을 내려다봤다. 아래층에서 세탁기 도는 소리가 묵직하게 올라와 방바닥을 울렸다.
"그러면 엄마는 그것도 자기 탓으로 생각할 거예요."
"아니잖아요."
"제가 맡고 나서 반으로 줄었는데요."
"······."
"엄마 장부를 봤어요. 노트에 손으로 쓰신 거요."
"그래서요."
"쓰러지기 3년 전부터 이미 내려가고 있었어요."
"그 얘기는 했어요?"
"······아니요."
"왜요."
"그걸 어떻게 말해요."
"······."
"엄마 인생인데요."
창이 서향이라 그쯤부터 그의 얼굴 반쪽이 붉은 역광 속에 잠겼다.
"그럼 오늘 궁금한 건 가게 얘기가 아니네요."
"······."
"뭘 물어보러 오신 거예요."
한참 걸렸다.
"제가 못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니라고, 말해도 되나요."
"······."
"그 말을 하면 엄마가 못한 게 되잖아요."
산가지를 꺼냈다. 쉰 개를 세고 나누고 덜어내는 걸 여섯 번 해야 해서 시간이 좀 걸린다. 그동안 그는 시계를 두 번 봤다.
산풍고(山風蠱)가 나왔다. 두 번째 자리가 움직였다.
"고괘예요. 이 괘는 이런 그림인데요. 위가 산이고 아래가 바람입니다."
"바람이 산에 막힌 거예요?"
"것도 되는데, 글자를 먼저 보시는 게 빠르겠네요. 고(蠱)라는 글자가 그릇 위에 벌레가 앉은 모양이에요."
"······썩었다는 거네요."
"오래 뒀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게 그거 아니에요?"
"아뇨. 뭘 잘못 넣어서 상한 게 아니고, 아무도 안 열어봐서 상한 겁니다."
괘 첫머리에는 이런 말이 붙어 있다. 원형(元亨), 이섭대천(利涉大川). 크게 통하고,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롭다.
"좋은 말 아니에요?"
"고치면 통한다는 거니까 지금은 아직 아니고요."
그 뒤에 이상한 말이 하나 더 붙어 있다. 선갑삼일(先甲三日), 후갑삼일(後甲三日).
"그건 무슨 뜻인데요."
"날 잡기 전에 사흘, 잡고 나서 사흘이라는 건데요. 여기서 사흘은 날짜라기보다 이만큼은 걸린다는 말에 가깝습니다."
"얼마나 걸리는데요."
"글쎄요. 그건 모르겠고, 스물세 해 걸려서 그렇게 된 걸 1년 5개월에 되돌리는 건 아니라는 정도는 적혀 있어요."
움직인 자리에는 여섯 글자가 있다. 간모지고(幹母之蠱), 불가정(不可貞).
"간(幹)이 나무 줄기라는 글자인데, 여기서는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씁니다. 뽑는다는 말이 아니고요."
"모(母)는요."
"어머니요."
그가 나를 봤다.
"······적혀 있어요? 어머니라고?"
"네."
"······."
"불가정(不可貞)은요. 정(貞)이 곧다는 뜻인데, 앞에 불가(不可)가 붙었습니다. 곧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거짓말하라는 거예요?"
"아뇨."
"그럼요."
"옳은 말을 옳은 순서대로 하면 안 되는 자리라는 겁니다."
"······그게 무슨 차이인데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이 괘 첫 번째 자리에는 아버지가 나오는데, 거기는 그런 단서가 없습니다. 두 번째에만 붙어 있어요."
그가 한참 있다가 물었다.
"아버지는 틀렸다고 해도 되고 엄마는 안 된다는 거예요?"
"것도 모르겠는데요. 삼천 년쯤 전에 적힌 거라서요."
"······."
"다만 지금 못 하고 계신 게 그거잖아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스물두 가지 중에 몇 개나 나가요."
"······멸치랑 콩자반은 나가고요. 한 예닐곱 개는 거의 안 나가요."
"그것도 새벽에 만드세요?"
"네."
"왜요."
"······스물두 가지니까요."
세탁기 소리가 한 번 멎었다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데요."
"그건 모릅니다. 대신 이 괘가 허용하는 모양이 몇 개 있어요. 어느 게 제일 닮았는지만 말씀해 주세요."
노트 뒷장을 찢어서 네 줄을 적었다.
하나. 안 나가는 예닐곱 가지를 뺀다. 오래된 손님 몇이 발길을 끊는다. 어머니가 왜 그걸 뺐냐고 묻는다. 한 달에 한 번씩, 같은 걸 묻는다.
둘. 스물두 가지를 그대로 만든다. 어머니가 잘하고 있다고 한다. 장부는 계속 같은 방향으로 내려간다.
셋. 접는다. 정리하는 데 반년쯤 걸린다. 어머니한테는 다 끝나고 말한다. 어머니는 그날 아무 말도 안 한다.
넷. 아무것도 안 정한 채로 1년이 더 간다. 새벽 다섯 시에 나가고, 하루에 세 번 전화를 받는다. 내년 이맘때 같은 걸 물으러 온다.
그가 종이를 오래 봤다. 그동안은 시계를 안 봤다.
"이거 네 개가 아닌데요."
"네?"
"다 엄마가 모르는 채로 끝나잖아요."
그렇다고 했다.
"넷 다 불가정이에요. 저기 어디에도 어머니한테 장부 얘기를 하는 건 없습니다."
"일부러 빼신 거예요?"
"아뇨. 적고 나서 저도 없는 걸 봤어요."
"······."
"그래도 하나만 고르세요."
그가 노트 뒷장을 손가락 끝으로 오래 쓸어내렸다. 창밖에서 붉은 기가 빠져나가며 방안 공기가 서늘해졌다.
"셋이요."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왜요. 정리하는 데 반년이 걸린대도요?"
내가 묻자, 그는 시계를 보지 않고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빠른 건 날짜가 아니에요. 셈이 빠르다는 뜻도 아니고요."
그가 손가락 끝에 붙은 밴드를 꾹 눌렀다.
"엄마가 병실 침대에 누워서 내 손을 붙잡고 똑같은 말을 물어볼 수 있을 때, 그때 끝내야 해요. 지금 병원에서 전화 오면 하루에 세 번씩 물어봐요. 오늘 멸치 몇 개 삶았냐, 콩자반 불렸냐, 단골 손님 누구 왔었냐. 그 질문이 뚝 끊기기 전에, 엄마가 자기 목소리로 '가게 어찌 됐어' 물어볼 수 있을 때 털어내야, 내 대답도 의미가 있어요. 더 지나면... 엄마가 묻고 싶어도 입이 안 떨어지거나,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와요. 그게 오기 전에 끝내야 빨라요."
그는 물잔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장사가 안돼서 접는다는 핑계도, 지쳐서 도망간다는 핑계도 아니에요. 그냥 엄마가 내 눈을 보고 '왜 접었어' 할 때, 내가 '엄마, 이제 그만해' 하고 이마를 맞댈 수 있는 마지막 남은 기한이에요. 그 기한이 지나는 게 제일 무서워요."
보온병 뚜껑이 미세하게 달그락거렸다. 다섯 시 이십오 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머니에서 꼬깃해진 종이를 폈다.
"셋으로 할게요. 반년이 걸리든, 그보다 더 걸리든... 그동안은 새벽 다섯 시에 나가서 스물두 개 그대로 만들게요. 다만 3년 전 장부 노트는 가방에 넣지 않고 집 서랍 깊숙이 넣어둘게요. 그걸 들고 있는 한 내가 망친 것 같아서 계속 숨이 막히니까."
그가 몸을 돌려 문쪽으로 향했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화면을 보지 않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엄마. 지금 가요. 콩자반? 아까 다 졸여서 식혀놨어요. 걱정 말고 눈 좀 붙여요."
목소리는 평온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묵직하게 멀어졌다. 세탁소 앞 알루미늄 대문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나는 열린 창틈으로 들어온 서늘한 바람에 찻잔을 치웠다. 화분 위 색 옅은 새순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두 번째 자리가 움직이면 고괘는 중산간(重山艮)이 된다. 산이 둘 겹친 괘고, 멈춘다는 뜻이다.
간기배(艮其背), 불획기신(不獲其身). 등에 멈추면 제 몸이 보이지 않는다고 돼 있다.
하필 등이라고 적어 놓은 게 이상해서 한참 봤다. 아직 잘 모르겠다.
이 글은 점술 상담이 아니라, 괘를 렌즈 삼아 상황을 다시 보는 연습입니다. 등장인물과 사연은 모두 가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