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서랍 두 칸

📅 2026.09.12 👁 39회 🏷️ #주역 #주역소설 #육효 #화산려 #旅卦 #나그네괘 #중년의고민 #정년퇴직 #가족관계 #돌아온아버지 #집이라는것 #짐을푼다는것
화산려(火山旅) 육이 → 화풍정(火風鼎)

3화. 서랍 두 칸

화산려(火山旅) 육이 → 화풍정(火風鼎)

간판을 못 찾아서 세탁소에 물어봤다고 했다. 아래층 주인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을 거다. 늘 그런다.

들어온 사람은 쉰일곱, 남자였다. 앉기 전에 방을 한 바퀴 둘러봤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앉으면서 바지 무릎을 두 번 털었다. 먼지 같은 건 없었다.

보온병에서 물을 따라 줬다.

"차는 없어요. 그냥 물입니다."

"아이고, 네."

"뭐가 궁금해서 오셨어요."

"집을 하나 얻을까 하는데요. 얻는 게 맞는지 아닌지를 모르겠어서요."

이야기는 이랬다.

서른둘에 첫 현장에 나갔다. 그 뒤로 스물다섯 해를 밖에서 살았다. 현장 열한 군데, 관사와 원룸과 컨테이너를 옮겨 다녔다.

집에는 두 달에 한 번 왔다. 금요일 밤에 올라와서 일요일 오후에 내려갔다.

"애 초등학교 졸업식을 못 갔어요. 그건 지금도 얘기가 나와요."

3월에 본사 발령이 났다. 정년까지 2년 남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집에서 출퇴근을 한다.

"좋으시겠네요."

"좋죠. 좋은데······."

일곱 달째 캐리어를 안 풀었다고 했다. 거실 구석에 세워 두고 아침마다 거기서 옷을 꺼내 입는다고.

"아내가 서랍 두 칸을 비워줬어요. 4월에요."

"아직 안 옮기셨고요."

"네."

"집을 얻으면 뭐가 편해집니까."

"회사 근처면 출퇴근이 한 시간 반 줄어요."

"그건 알겠고요. 뭐가 편해지냐고 물었어요."

물잔을 들었다가 그냥 내려놨다.

아내 얘기가 나왔다. 십 년 전부터 주민센터에서 요가를 배웠고 지금은 가르친다고 했다.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 저녁에는 집에 없다.

딸은 스물아홉이고 작년에 나갔다.

"집에 가면 불이 꺼져 있어요. 제가 제일 먼저 들어가요. 삼십 년 만에 처음이에요."

"불 켜고 앉아 계시면 되잖아요."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뭐 하고 계신데요."

"티비 켜놓고 소파에 앉아 있죠. 근데 앉아 있으면 자꾸, 여기 앉아도 되나 싶구요."

"누가 뭐라고 합니까."

"아뇨. 아무도 뭐라고 안 해요."

"그럼요."

"그게 이상한 거죠. 아무도 뭐라고 안 하는 게."

아래층에서 세탁기 도는 소리가 올라왔다.

"제가 없는 동안 저 사람들끼리 맞춰 놓은 게 있어요. 리모컨을 어디 두는지, 설거지를 언제 하는지, 화장실 불을 언제 끄는지. 저만 매번 틀립니다."

"그래서 나가시게요."

"나가면 다시 손님이 되잖아요."

그가 좀 웃었다.

"손님은 안 틀리거든요."

"그럼 아까 질문 다시 해보실래요."

한참 걸렸다.

"······짐을 풀어도 되는 건지를 모르겠어요."

산가지를 꺼냈다.

쉰 개를 세고 나누고 덜어내는 걸 여섯 번 해야 해서 시간이 좀 걸린다.

그동안 그는 내 손만 봤다.

세는 걸 세는 사람 같았다.

화산려(火山旅)가 나왔다.

두 번째 자리가 움직였다.

"여괘예요. 이 괘는 이런 그림인데요.

위가 불이고 아래가 산입니다."

"산에 불나면 큰일 아닌가요."

"산이 타는 게 아니고요. 불이 산을 지나가는 겁니다. 탈 게 있는 쪽으로 옮겨 붙고, 다 타면 또 옮겨요. 산은 가만히 있고."

괘사에는 소형(小亨)이라고 붙어 있다. 작게 형통하다.

"작게요?"

"네. 크게는 안 된다고 아예 못을 박아 놨어요."

"박아 놨다고요."

"네. 여괘가 허락하는 게 거기까지예요."

움직인 자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여즉차(旅卽次), 회기자(懷其資), 득동복정(得童僕貞). 나그네가 묵을 자리를 얻고, 노자를 지니고, 사람을 얻는다.

"이 괘에서 제일 나은 자리입니다."

"제일 나은데 왜 나그네예요."

"그게 이 괘의 조건이라서요."

그가 물잔을 반 바퀴 돌렸다.

"차(次)라는 글자가 있는데요. 집이 아니에요. 여관 같은 겁니다. 잠깐 묵는 자리요."

"저는 제 집에 있는데요."

"네."

"······그럼 우리 집이 여관이라는 말씀이세요?"

"그건 제가 한 말이 아니고요."

그가 나를 좀 노려봤다. 그럴 만했다.

"선생님, 즉차는 스물다섯 해 동안 하신 거잖아요."

"······그건 일이었죠."

"열 한 번 하셨고요."

"그렇죠."

"열 한 번 다 짐 푸셨어요?"

"그럼요. 첫 날 밤에 다 풀어요. 안 풀면 일이 안 돼요."

"왜요."

"방이 어디 뭐가 있는지 알아야 밖에 나가서 일을 하죠. 짐이 가방에 있으면 그 방은 그냥 창고예요."

말해 놓고 그가 멈췄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열두 번째는 왜 안 푸십니까."

한참 있다가 그가 말했다.

"풀면 열두 번째가 되잖아요."

나는 노트에 그 말을 적었다. 적는 걸 보더니 그가 좀 민망해했다.

"득동복정이라는 게 뒤에 붙는데요. 옛날 말이라 그대로 읽으면 곤란하고, 요점은 혼자 안 묵는다는 겁니다. 여관방도 사람이 붙어야 지낼만해 진다는 얘기예요."

"저희 집에 사람 있는데요."

"네. 있죠. 리모컨 어디 두는지는 물어보셨어요?"

"······아뇨."

"왜요."

"물어보면 제가 모르는 게 되잖아요."

"지금도 모르시잖아요."

"······."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데요."

"그건 모릅니다. 대신 이 괘가 허용하는 모양이 몇 개 있어요. 읽어 보시고 어느 게 제일 닮았는지만 말씀해 주세요."

노트 뒷장을 찢어서 네 줄을 적었다.

하나. 짐을 푼다. 서랍 두 칸에 다 안 들어간다. 남은 건 캐리어에 그대로 두고 캐리어는 베란다로 옮긴다. 한 달쯤 뒤에 아내가 한 칸을 더 비워 놓는다. 그 얘기는 서로 안 한다.

둘. 집을 얻는다. 주중에 거기서 자고 금요일 밤에 온다. 스물다섯 해 하던 것과 요일만 바뀐다. 편하다. 편해서 좀 서운하다.

셋. 아내가 먼저 묻는다. 저거 언제 풀 거냐고, 별 뜻 없이 묻는다. 그날 밤에 반쯤 풀다가 만다. 나머지 반은 그대로 둔다.

넷.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내년 이맘때도 캐리어가 거실 구석에 서 있다. 아무도 치우라고 안 한다. 선생님도 안 치운다.

안경을 꺼내 쓰고 종이를 한참 봤다.

"하나요."

"왜요."

"······서랍 얘기를 서로 안 한다는 게, 제일 우리 집 같아서요."

"넷 중에 뭐가 일어날지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넷 다 소형이에요."

"작게 형통하다요."

"네. 저 안에 크게 좋은 건 하나도 없어요."

"그럼 하나나 넷이나 비슷한 거 아닙니까."

"비슷할 수 있어요. 하나는 선생님이 하는 거고 넷은 안 하는 건데, 그건 다르고요."

그가 종이를 접어서 지갑 카드 칸에 밀어 넣었다. 잘 안 들어가서 두 번 접었다.

일어서면서 무릎을 짚었다.

"이게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요."

"모르세요?"

"모릅니다. 그런 말은 안 나와요."

문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물잔을 들고 나가던 참이었다.

"아이고. 이거 들고 갈 뻔했네."

잔을 탁자에 올려놓고 나갔다.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세탁기 소리에 섞여서 금방 안 들렸다.

두 번째 자리가 움직이면 여괘는 화풍정(火風鼎)으로 바뀐다. 솥 괘다. 발이 셋이라 한자리에 놓고 쓰는 물건이고, 들고 다니라고 만든 게 아니다.

다만 그 괘 맨 아랫자리에는 정전지(鼎顚趾)라는 말이 나온다. 솥을 엎어서 발을 뒤집는다고. 묵은 것을 쏟아내는 장면이다.

오늘 할 말은 아니었다.

창틀 화분을 반 뼘쯤 옮겨 놨다. 해 드는 자리가 철마다 조금씩 밀린다.

잎은 그대로였다.

이 글은 점술 상담이 아니라, 괘를 렌즈 삼아 상황을 다시 보는 연습입니다. 등장인물과 사연은 모두 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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