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일곱 자」
그가 들어와 앉더니 종이 한 장을 탁자에 놓고 손바닥으로 한 번 눌러 폈다. 그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자는 탁자에서 한 뼘쯤 떨어져 있었다. 당기지 않았다.
컵을 밀어 놨더니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대로 이 분쯤 갔다. 아래층에서 세탁기가 돌고 있었다.
"뭘 물으러 오셨습니까."
"목요일에 회의가 있는데요. 거기서 말을 할까요, 아니면 그만둘까요."
서른일곱이라고 했다. 식품회사에서 품질관리를 구 년 했다.
셔츠 가슴 주머니에 볼펜이 두 개 꽂혀 있었다. 하나는 검정이고 하나는 빨강이었다.
"이월에도 회의가 있었습니다. 원료 거래처를 바꾸는 안건이었고요."
"반대하셨고요."
"네."
"어떻게 하셨습니까."
"자료를 열여섯 장 만들어서 갔어요. 칠 분 말했습니다."
"그러고요."
"통과됐어요."
그가 탁자 위 종이를 내 쪽으로 반 뼘 밀었다. 회의록 출력물이었다.
안건 밑에 한 줄이 있었다. 품질팀 의견 청취.
"일곱 자예요."
"세어 보셨습니까."
"네."
"그 뒤에 달라진 게 있습니까."
"삼월부터 안건 목록을 회의 시작하고 받아요. 전에는 전날 왔어요."
"몇 번이요."
"여섯 번이요."
"그 얘기를 누가 하던가요."
"아무도 안 해요. 그게 정해진 것도 아니고요."
"팀장님은요."
"회의 다음 날 커피 사 주셨어요. 고생했다고요."
"그 말씀만요."
"네. 마흔여덟이신데 작년에 팀 두 개 합쳐지면서 사람이 다섯 줄었어요. 단가는 위에서 내려온 거고요."
"같이 자료 만든 사람이 있었습니까."
"정 씨요. 스물아홉이고요. 회의에서는 아무 말 안 했어요."
"그 뒤에요."
"복도에서 자기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 번 했어요. 삼십 초쯤이요. 육월에 다른 팀으로 갔습니다."
"왜 가만있었는지 물어보셨어요."
"올해 전환 심사가 있었어요. 물어볼 게 아니죠."
"이월 이후에 그 얘기를 꺼낸 사람이 있습니까."
"없어요."
"선생님은요."
"······."
"칠 개월이요."
"제가 꺼내면 뒤끝 있는 사람 되죠."
"그래서 목요일에 하시겠다는 거고요."
"제대로 하면요. 그날은 제가 잘못했어요."
"뭘 잘못하셨습니까."
"목소리가 컸어요. 팀장님 말을 중간에 끊었고요. 그러니까 내용이 안 들렸겠죠."
그가 잠깐 멈췄다.
"제가 그때 조용히 말했으면 달라졌을까요."
"그건 제가 못 봅니다. 여기 적힌 건 일곱 자예요. 목소리 크기는 안 적혀 있습니다."
"어떻게 말해도 일곱 자라는 거예요?"
"거기까지는 안 적혀 있습니다. 적힌 게 일곱 자라는 것까지가 제가 본 겁니다."
산가지를 세는 동안 그는 한 번 입을 열었다.
"잘못 세면 다른 게 나와요?"
"네."
그러고 끝까지 아무 말도 안 했다. 이십 분 가까이 걸렸다.
앞을 물이 막고 뒤에 산이 서 있는 그림이 나왔다.
"건(蹇)입니다. 발이 잘 안 나간다는 글자예요. 얼어서 그렇다는 쪽입니다."
"절뚝거린다는 거네요. 제가 절뚝거린다고요."
"이 그림에는 앞에 물이 있고 뒤에 산이 있습니다. 발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안 그려져 있어요. 건은 발 얘기가 아니고 길 얘기입니다."
그가 종이 모서리를 봤다.
"괘 위에 이서남 불리동북(利西南 不利東北)이 적혀 있습니다. 서남이 이롭고 동북은 이롭지 않다고요."
"그게 무슨 방향이에요."
"오래전에 적힌 방향입니다. 선생님 회사가 어느 쪽인지는 여기 없어요."
"움직인 자리는 아래에서 세 번째입니다. 거기 붙은 말이 왕건래반(往蹇來反)이에요. 가면 절뚝거리고, 오면 되돌아온다."
"······가지 말라는 거네요."
"가지 말라고는 안 적혀 있습니다. 가면 절뚝거린다고 돼 있어요. 절뚝거리면서 가는 것도 가는 겁니다."
"반은요. 반성하라는 건가요."
"돌아온다는 글자입니다. 자기를 돌아보라는 뜻이 아니고, 발길이 되돌아온다는 쪽이에요."
"이월에 칠 분 하셨다는 게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그가 가만히 있었다. 한참이었다.
"저희가 지금 쓰는 데는 팔 년 거래했습니다. 바꾸려는 데는 작년에 입고 검사에서 두 번 걸렸어요. 수분값이요. 기준 안에는 들어옵니다. 상한 근처예요. 상한 근처면 여름에 넘어가요. 저희 라인이 사십 도까지 올라가니까요. 넘어가면 반품이 아니고 회수입니다. 회수를 한 번 하면 거래처가 안 돌아와요. 단가로 아끼는 게 연간 이천사백만 원이고, 회수 한 번이면 그 삼 년치가 나갑니다. 그러니까 이건 싸게 사는 게 아니고 삼 년을 미리 쓰는 겁니다. 여름 데이터를 한 번 보고 결정해야 됩니다. 저는 반대합니다."
말하는 중간에 그는 일어서 있었다.
앉으면서 의자를 당겼다. 이번에는 탁자에 붙었다.
"······죄송합니다."
"그게 칠 분입니까."
"아니요. 지금은 삼 분쯤 됐을 거예요. 그날은 팀장님이 중간에 두 번 물으셨어요."
아래층 세탁기가 멎었다. 방이 조용해졌다.
"이걸 지금 여기서 하고 있네요."
그가 컵을 당겨서 물을 마셨다.
"이월 이후로 그 얘기를 꺼낸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팀장님도, 정 씨도, 선생님도요."
"······네."
"왕건래반은 갔다가 되돌아온 자리에 붙은 말입니다. 선생님은 이월에 가셨어요."
책장에서 책 한 권을 뽑았다. 주역하고는 상관없는 책이었다.
"그거 찢어도 되는 거예요?"
"안 볼 겁니다."
속표지 앞의 백지를 뜯어서 네 줄을 적었다.
하나. 목요일 회의에서 다시 말한다. 준비한 대로 끝까지 한다.
— 가는 쪽입니다. 절뚝거린다고 적힌 그 방향이에요.
둘. 팀장님한테만 따로 말한다. 회의가 아닌 자리에서.
— 듣는 사람이 한 명으로 줄어듭니다. 회의록에는 안 남습니다.
셋. 이월 자료 열여섯 장을 정 씨한테 보낸다.
— 그 방에 없는 사람한테 가는 겁니다.
넷.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목요일에 들어가서 안건만 듣고 나온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월 회의록은 일곱 자로 남습니다.
"넷 다 같은 자리에서 나온 겁니다. 이월 회의록이 고쳐지는 건 하나도 없고요."
그가 네 줄을 두 번 읽었다.
"여기 하나 없는데요."
"뭡니까."
"······이월 회의록에 제 얘기를 넣어 달라고 하는 거요."
펜을 밀어 줬는데 그가 자기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냈다. 빨간 걸 꺼냈다가 검정으로 바꿔 쥐었다.
다섯 번째 줄은 그가 적었다.
다섯. 이월 회의록을 고쳐 달라고 한다.
그 아래는 비어 있었다.
"이건 뭐라고 쓰죠."
"저도 안 써집니다. 나머지 넷은 선생님이 하시는 거고, 이건 남이 해 줘야 되는 거라서요."
"······다섯 번이요."
"왜요."
"거기 일곱 자 말고 아무것도 없으면요. 제가 안 한 거잖아요."
"······."
"그 회의록 열아홉 번 열어 봤어요. 칠 개월 동안이요."
"열아홉 번이요."
"네. 세어 놨어요."
그가 종이를 접어서 회의록 출력물 사이에 넣었다.
"목요일에 뭘 할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오늘 정할 일은 아니고요."
일어서면서 그는 의자를 그대로 두고 갔다. 탁자에 붙어 있었다.
오늘 나온 건 건이었다. 칸 여섯 개 중에 아래에서 세 번째하고 다섯 번째만 굵고 나머지 넷은 가늘다. 위 세 칸이 물이고 아래 세 칸이 산이라, 앞을 물이 막고 뒤에 산이 서 있는 그림이다.
움직인 건 아래에서 세 번째, 굵은 칸이었다.
그 칸이 가늘어지면 아래쪽이 산에서 땅으로 바뀐다. 위는 그대로 물이다. 땅 위에 물이 얹혀 있는 그림을 비(比)라고 한다. 나란히 붙는다는 뜻이다.
건이 오늘이고 비가 나중인 게 아니다. 물이 멀리 있는 것처럼 그린 것이 건이고, 닿아 있는 것처럼 그린 것이 비다. 물은 두 장에서 같은 자리에 있다.
문이 닫히고 나서, 그가 한 말의 앞부분을 소리 내어 해 봤다.
저희가 지금 쓰는 데는 팔 년 거래했습니다.
거기까지 하고 그만뒀다. 칠 분은 길다.
이 글은 점술 상담이 아니라, 괘를 렌즈 삼아 상황을 다시 보는 연습입니다. 등장인물과 사연은 모두 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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