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소리가 계단 중간까지 올라왔다가 도로 내려갔다.
한참 있다가 다시 올라왔다. 문 앞에서 좀 서 있었다. 섬유유연제 냄새가 같이 들어왔다.
"여기 맞죠."
"맞습니다."
의자를 조금 당겨 앉았다. 앉고 나서는 자세를 거의 안 바꿨다. 손에 A4 한 장을 반으로 접어 들고 있었다.
창틀 쪽을 한 번 봤다.
"저거 잎 끝이 말랐는데요."
"압니다."
"물을 주면 그렇게 되기도 해요. 밑에 고여서."
말이 느렸다. 한 마디 하고 한 박자 쉬었다.
"오래 걸려요?"
"뽑는 데 이십 분쯤 갑니다."
그가 휴대폰을 꺼내 뭘 눌렀다. 타이머였다. 화면을 엎지 않고 탁자 위에 그대로 뒀다.
"모임이 있어요. 넷이요. 여자 넷이요. 대학교 때 도서관에서 근로 같이 하던 애들."
"지금은요."
"저는 계속 도서관에 있어요. 계약직으로요. 삼 년 됐어요. 다른 애들은 다 다른 데 갔고요."
스물여덟이라고 했다. 넷이 다 동갑이다.
"올해 안에 한 번은 넷이 모이기로 했어요. 작년 12월에 제가 그렇게 정했어요."
접은 종이를 폈다. 날짜가 적혀 있었다. 세로로 길게.
"열한 번 잡았어요. 2월부터요."
"열한 번이요."
"펜션도 걸어 놨어요. 11월 셋째 주 토요일. 계약금 십만 원 냈고요."
열한 개였다. 2월에 두 개, 3월에 하나, 그 다음은 달마다 하나씩이었다.
"오늘까지가 무료 취소예요."
그가 종이를 다시 접었다.
"날짜를 올리면 누가 제일 먼저 답합니까."
"지영이요. 미안하다고요. 작년 4월에 애를 낳았거든요. 남편이 교대 근무라 주말에 혼자 봐요. 그건 뭐, 어쩔 수 없죠."
"그 다음은요."
"혜원이는 하트를 눌러요. 답은 안 하고요. 임용 3 년차예요. 재작년까지는 말을 했는데 작년부터는 안 해요."
"소연이는요."
"좋다고 했다가 그 주에 안 된다고 해요. 세 번 그랬어요. 회사 때문에 지방으로 가서 왕복이 다섯 시간이에요. 오려면 전날 올라와서 자야 돼요."
"다들 그러고 살잖아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영이랑 혜원이는 둘이 두 번 봤어요. 사진 올라와서 알았어요. 근데 그건 지영이가 애 병원 가는 길에 혜원이 동네를 지나서 잠깐 본 거예요. 두 번 다요."
그가 다음 말을 꺼낼 때까지 좀 걸렸다.
"그래서 여쭤보려고요. 이번에 한 번 더 잡을까요, 아니면 제가 빠질까요."
"빠지시면 어떻게 됩니까."
"없어지겠죠."
"뭐가요."
"모임이요."
"올해 몇 번 모이셨습니까."
그가 나를 봤다.
"한 번도 안 모였어요."
"그럼 없어질 게 뭡니까."
그가 종이 접힌 자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넷이 마지막으로 같이 앉은 게 언제였습니까."
"작년 10월이요."
"넷이요?"
"······소연이는 화면으로 했어요. 영상으로 켜 놓고."
"그 전에는요."
그가 종이를 뒤집더니 뒷면에 뭘 적기 시작했다. 연도를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 오래 걸렸다.
"······5 년 전이네요."
"저는 작년인 줄 알았어요."
"제가 센 게 아닙니다."
그가 종이를 뒤집어 놨다.
산가지를 세는 동안 그는 타이머를 보지 않았다. 한 번 "그거 왜 쉰 개예요" 하고 물었고, 나는 한 개는 안 쓴다고만 했다.
우레가 하늘 위에 있는 그림이 나왔다.
"대장(大壯)입니다. 크게 굳세다는 뜻이에요."
"좋은 거 아니에요?"
"괘 위에는 이정(利貞) 두 글자만 붙어 있습니다. 곧아야 이롭다. 세다고는 적혀 있는데 된다고는 안 적혀 있어요."
"······."
"움직인 자리는 아래에서 세 번째였습니다. 저양촉번 리기각(羝羊觸藩 羸其角). 숫양이 울타리를 들이받아서 뿔이 걸렸다."
"제가 양이에요?"
"양이 왜 받았는지는 안 나옵니다. 뿔이 걸렸다고만 돼 있어요."
"울타리 넘으려고 그런 거겠죠."
"앞에 한 줄이 더 있습니다. 정려(貞厲). 곧게 해도 위태롭다."
그가 처음으로 나를 오래 봤다.
"여기 잘못했다고는 안 적혀 있습니다. 곧게 했다는 걸 인정하고 들어가는 글자예요. 대신 그래도 위태롭다고 붙여 놨고요. 이 괘는 선생님이 융통성이 없어서 이렇게 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
"뿔이 걸린 양은 앞으로도 못 가고 뒤로도 못 갑니다. 빼려면 뒤로 한 번 물러야 되는데, 받는 데 쓴 힘하고 빼는 데 쓰는 힘이 반대쪽이라서요."
"그럼 11월을 놓으라는 거잖아요."
"11월은 아직 안 왔습니다."
"······."
"열한 번 잡으신 날짜가 전부 올해입니다. 그런데 방금 세신 건 다섯 해 전이에요."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선생님이 못 놓고 계신 게 11월 셋째 주 토요일이면, 그건 아직 안 온 날이라 붙들 것도 없습니다. 다섯 해 전이면 이미 지난 날이고요. 둘 중에 어느 쪽에 뿔이 걸려 있는지는 제가 정하지 않습니다."
"······."
그가 종이 쪽으로 손을 댔다가 뗐다.
"제가 안 잡으면요."
"······."
"우리가 원래 안 친했던 게 되는 거예요?"
휴대폰이 울렸다. 그가 소리를 안 꺼 놨다.
"······펜션이네요. 오늘 여섯 시까지래요."
"몇 시입니까."
"네 시 사십분이요."
"선생님은 이런 거 해 보셨어요. 몇 명이 오래 모이는 거."
"했습니다."
"지금도 해요?"
"아니요."
"왜요."
"날짜를 잡던 사람이 안 잡게 돼서요."
그가 종이를 내 쪽으로 밀었다.
"뒷면 쓰세요. 앞면은 날짜라서요."
하나. 예약을 취소하고, 취소했다고만 쓴다. 날짜 얘기는 더 안 한다. — 열한 번 잡던 사람이 처음으로 안 잡는다. 단톡방은 그대로 있다.
둘. 예약을 두고, 오는 사람만 온다고 쓴다. 혼자 가게 돼도 간다. — 넷이 아니어도 그날은 남는다. 몇 명인지는 그날 알게 된다.
셋. 넷 말고 한 사람한테만 따로 연락한다. 모임 얘기는 빼고. — 넷이라는 단위가 없어지고 한 명이 남는다.
넷. 이번에도 잡고, 안 되면 십이월에 또 잡는다. — 아무것도 안 바뀐다. 열두 번이 되고 열세 번이 된다.
"이 중에 뭐가 되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네 개 다 뿔이 걸린 자리에서 나온 겁니다. 빠진 자리에서 나온 게 아니고요."
그가 네 줄을 위에서 아래로 한 번, 아래에서 위로 한 번 읽었다.
"셋이요."
"누구한테요."
"혜원이요."
"답이 제일 없는 분 아닙니까."
"······그러니까요."
그가 가방 손잡이를 잡았다가 놨다.
"지영이는 미안하다고 하잖아요.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면요. 제가 또 잡아야 되거든요."
"······."
"혜원이는 아무 말도 안 해요. 그래서 걔한테는 그냥 만나자고 할 수 있어요."
그가 종이를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 처음으로 등을 의자에 기댔다. 잠깐이었다.
타이머를 껐다.
"십칠 분이네요."
"이십 분 걸린다고 했는데요."
"제가 안 보고 있어서 그런가 봐요."
계단 내려가는 소리를 끝까지 들었다. 올라올 때는 중간에서 한 번 멈췄는데, 내려갈 때는 안 멈췄다.
오늘 나온 건 대장이었다. 칸 여섯 중에 아래 넷이 굵고 위 둘만 가늘다. 아래쪽이 하늘이고 위쪽이 우레다. 굵은 것들이 아래에서 위로 밀고 올라가는 모양이라 크게 굳세다고 부른다.
움직인 건 아래에서 세 번째, 굵은 칸이었다.
그 칸이 가늘어지면 아래쪽이 하늘에서 못으로 바뀐다. 위는 그대로 우레다. 고인 물 위에서 우레가 우는 그림을 귀매(歸妹)라고 한다. 따라 들어간다는 뜻이다.
대장이 오늘이고 귀매가 나중이라는 말이 아니다. 두 장 사이에는 날짜가 없다.
다섯 해 전이면 이 방을 둘이 쓰던 때다.
이 글은 점술 상담이 아니라, 괘를 렌즈 삼아 상황을 다시 보는 연습입니다. 등장인물과 사연은 모두 가상입니다.